
ⓒ Yoshihiro Togashi, SHUEISHA INC.
일개 범부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고된 창작 활동 탓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저 앞으로는 몸을 생각해가며 일하겠다 천명하신 바 있는 토가시 요시히로 화백께오서, 황송하옵게도 채 여덟 달도 안 되는 놀랍도록 짧은 기간만에 내어놓으신 신간, 헌터X헌터 제23권 '6-①'! 이번 권은 '만화책 표지는 풀 컬러로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기존 통념을 과감히 혁파해 전위적인 실험성을 갖추면서도, 동시에 그 동양적인 선과 여백의 미를 여태껏 자신을 지지해준 이들의 기호에 등을 돌리지 않고 보답하는 데 충분히 활용, 대중성마저 굳건히 유지하면서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낸 경이로운 표지 일러스트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서부터 너스레는 그만 두고) 그런 온갖 종류의 기행과 잡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만화의 유통 기한은 아직 지나지 않은 듯 싶군요. 그 이유라면 오직 하나,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부정해버릴 수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는 재미있다!'라는 점 때문이랄까. 물론 이 넓은 세상에 이 만화 만큼 재미있는 만화가 또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앞서 열거한 모든 단점들조차도 묵과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재미를 짜내는 만화 또한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아니 뭐 다른 만화였다면 애시당초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그다지 공정한 비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 이 만화를 버리지 못하고 붙어있는 독자라면 이번에도 미련을 끊고 등을 돌리기는 쉽지 않을 듯. 사실 구독을 그만둘 거라면 모든 면에서 독자들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던 키메라 앤트 편 시작 직후가 적기였거늘, 이제는 그마저도 (좋은 의미에서)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까 말입니다. 무엇보다 스토리적으로 대체 어떻게 풀어나갈지 막막하게만 보이던, 이번 에피소드의 적 키메라 엔트들에 대한 대응책이 여러 형태로 가시화되어 분명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커다란 플러스 요소로. 특히 그런 맥락에서 과거 이미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은 있었으나 당시로서는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탓에 무의미하게만 보였던 카드를, 진부하지만 상당한 호소력이 있는 '소년점프적 가치'와 곁들여 다시 한 번 꺼내든 것은 꽤 유효한 선택이었다는 인상입니다. (어찌보면 결국 그게 한계라는 소리도 되지만)덕분에 그간 다소 존재감이 애매했던 일부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제 위치를 찾음으로서 이들과 연계되는 극의 흐름 또한 한결 명확해졌고, 거기다 이 만화의 몇몇 장점 중 하나인 - 그나마 스스로의 발간 텀은 숙지하고 그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 방만하게 퍼지는 일 없이 좋은 템포를 유지하는 극 진행 페이스 또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감상)에 있어 상당한 탄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지요. 이번에도 여전히 허울은 좋지만 결국 반쪽짜리에 머무르는 '선연재 후수정' 작화라던가, 어쩌면 편집부가 내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시위인지도 모르는 내부 수정, 그리고 바로 그런 상황을 초래한 작가 자신의 악취미 등이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와중에도 흥미진진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 덕이라 해야할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본작의 파탄적인 작품 외적 행태가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만... 솔직히 여기까지 온 마당에서는 쉽지 않군요,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란. 어차피 누가 뭐라 한들 이제와서 뭔가 달라질 성 싶지도 않고, 이럴 때는 어디 갈 데까지 가보라지 하는 심정으로 그 행보를 지켜보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그것도 '재미'라는 극히 불안정한 변수가 유지되는 동안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겠습니다만 - 아무튼 언제나 그랬다고는 해도 역시 참 곤란한 물건입니다, 차라리 확실하게 망가져버리기라도 하면 미련없이 떨쳐낼 수 있겠는데... 적어도 작품 내적으로는 '할 만큼 한다'고까진 못 해도 왠만한 여타 '성실한' 작품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레벨까지 그만한 수고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으니, 이거야 원,
어쨌든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덧> '많이 쉬는 덕에 그만큼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인정할 수 없어요. 다른 작가라면 혹시 또 몰라도 이 양반은 현재 보여주는 것 이상의 포텐셜을 지니고 있으면서 대충 그 5, 6할 정도만 적당히 써가면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게 눈에 빤히 보이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