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트에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지장을 줄 정도까진 아니지만 극의 내용과 관련된
언급이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경우 완전 백지 상태에서의 감상은 자칫
파장이 일치하지 않는 관객에게 격한 거부반응을 유발할 수도 있는 고로 일단 한 번 읽어
보신 뒤 감상하셔도 큰 손해는 없으리라 판단되니, 이 점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기재,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센티미터'를 얼마 전 관람했습니다.
약 60여 분에 달하는 그 상영이 끝난 후 이어진 건 기나긴
탄식... 그리고 필설로는 이루 형용하기 힘든 아찔한 감흥.
사실 이번 작품은 과거 어느 때 이상으로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이 작품은 창작자로서 신카이 마코토의 거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있는, 그것도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 이상으로 농도짙게 압축되어 있는 결정체 그 자체라고.
화면 가득 펼쳐지면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서글플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 그와 감미로운 조
화를 이루며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선율,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무언가에 대
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정서, 그리고 이들을 기성 애니메이션보다는 영상소설에
가까운 문법과 '특유의'라고밖에 달리 표현 못할 감성으로 절묘하게 편집, 조율하는 연출력.
여기서 좀더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들면 너무나도 전하고 싶지만 전해지지 않는 마음
으로 인한 상처라던가, 이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의 우울, 그러한 현실의 반대
선상에 끝없이 펼쳐진 '아득한 저편'을 향한 동경, 그러면서도 우리가 평소에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치밀한 일상묘사 등도 들 수 있겠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신카이 마코토 작품을 통해 맛볼 수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그러나
과거 그 어느 때 이상으로 깊고 복잡한 여운을 남기며 스쳐가더라는 것이 제가 느낀 감상입니다.

비록 그의 또다른 트레이드 마크 격으로 받아들여지던 SF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기는
했지만, 이는 '우리의 일상에는 극적인 드라마도 하늘의 돌연한 계시도 거의 없지만, 그
렇다 해도 세상은 충분히 깊은 맛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현실의 그런 측면을 필
름에 담아 감상이 끝난 후에는 익숙하던 풍경이 평소보다 빛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그
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부분이면서, 동시에 앞서 언급했던 '특징'들이 작
품별로 다채롭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번 한꺼번에 구현된 탓에 일각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비판 - '변화없는 자기복제' 등 - 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지금까지 그가 선보여온 작품들에 있어 SF란 중간중간 옅보이는 개인적 애착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면면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 혹은 방식이었을 뿐, 결국 그가 정
말 그리고 싶었던 것 그 자체는 아니었으니까요. (상업적 이유도 좀 있었고... 겸사겸사)
어느 쪽이었든 제가 보기에는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더불어
본작의 또다른 큰 변화 -최대의 논란거리이기도 한 '언밸런스한' 3부작 구성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가 그려내고 싶었던 바가 이토록 강렬하게 가슴에 와 닿았을지.
다만 이 구성 부분은 사실 어찌 보면 도박이었던 게, 본래 장편보다는 단편 쪽에 훨씬 강한 면모
를 보였던 신카이 감독이었기에 세 개의 단편이 한 세트로 구성된다는 계획은 당초 그에게는 약
점을 보완해줄, 따라서 그의 장편에 불만을 느끼던 관객에게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만족을 보
장해줄 안전장치로 여겨졌건만,,, 이게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전혀 다른 전위적인 형태였다는
거라, 사실 이 작품에 대한 찬반이 극심하게 갈라지는 이유 중 절반 이상은 바로 이 부분에 기인
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지요. 나머지 절반이라면 역시 이야기의 향방 그 자체에 있겠고.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아득한 그때 그 시절, 아직 둘 다 어렸던 주인공 타카키와 아카리의
가슴떨리는 첫사랑을 애틋하게 그려낸 제1화 '앵화초', 그리고 전학으로 인해 헤어진 아카
리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여러 해가 흘러 청소년이 된 타카키의 복잡한 심경을, 전학온 타
카기에게 첫 눈에 반한 뒤로 짝사랑을 계속해온 소녀 카나에의 시점에서 그려낸 제2화 '코
스모나우트', 이 두 에피소드까지는 이렇다 할 문제가 없다는 데에 누구나 동의할 겁니다.
사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에서 '바랄' 수 있는 대부분의 좋은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
니라 나름대로의 자체 완결성까지 갖춘 완성도 높은 일품인 제1화는 물론, 결국 전체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관찰자로서 머무르게 되는 카나에의 비중이 필요 이상으로 큰 탓에 작품의
일관성이 다소 흔들린다는 단점이 있기는 해도 여전히 많은 장점을 간직한 제2화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눈에 불이라도 켜고 찾아나서지 않는 이상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이야기들이니까요.

문제는 바로 그 다음,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완전히 어른이 된 둘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펼쳐지는 이야기 - 표제작이기도 한 제3화, '초속 5센티미터'로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것이, 내용 면에서나 구성 면에서나 지금까지 관객의 마음속
에 쌓인 기대 혹은 예상하던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질주한다는 데에 있겠지요.
사실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주요 흐름인 타카키와 아카리의 관계에 대해 희망을 암시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기는 커녕 오히려 지속적으로 조명되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결국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관계가 어디까지 계속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만 쌓이면 쌓였지.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어딘가에는 희망이 존재하기를 믿고 싶어지는 것이 관객의 마음일진데... 그러한 기대는 멋지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형태로 너무나도 멋지게 배반당하고 맙니다.
혹자는 '야마자키 마사요시의 그 좋은 곡을 써서 뮤직 비디오를 만들고 싶었다는 건 이해
하지만, 결국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단지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한 전주였을 뿐이라는 것은
낭비'라 혹평하고, 혹자는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단 한 순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하게 만개하는 벗꽃과도 같이 덧없는 그러나 한없는 아름다움'이라 호평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상반되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이 '배반'의 형태에 대해서는 그저 백문이 불여일
견이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느껴보라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하겠습
니다만... 적어도 저로서는 이러한 형태 - 보다 많은 이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 만한 무
난한 형태가 아닌, 바로 이런 파격적인 형태 - 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기나긴 방황 끝에
얼어붙은 타카키의 씁쓸한 감정이 마치 새봄을 맞이한 꽃망울들이 일제히 터지듯 해방되
고, 그로 인해 비로소 '초속 5cm'라는 정체된 시간에서 벗어나 엷은 미소와 함께 미래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과연 그렇게까지 가슴 벅찬 카타르
시스와 만감이 교차하는 복잡미묘한 여운을 맛볼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드는군요.

물론 형식 운운 이전에 내용적으로 그들의 관계가 도달한 종착점 그 자체가 불만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앞서 언급되기도 했고 또 그렇지 않더라도 여기까지 오면 슬슬 깨달을 수 있듯이,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역시 때로는 달콤하면서도 때로는 씁쓰레하지만 그렇기에 복잡한 아름다움을 지닌, 현실의 깊이있는 맛. 결국 현실이란 마음먹은 대로 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가 겪어온 각자의 현실을 통해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씁쓸해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안타까움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 아무리 미화된 것이라 해도 작품 속에서까지 현실의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쓴 맛을 공감은 커녕 쳐다보기조차 싫은 관객도 있겠으나, 그건 시시비비가 아닌 호불호의 문제이니만큼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는 바는 아닐 테고.
단 이건 어디까지나 제 견해에 지나지 않기는 하지만...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아니 모르긴 몰라도 이번 작품을 계기로 한층 더 진지하게 이러한
노선을 견지해갈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의 관객층 또한 이쯤에서 슬슬 극명하게 나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서부터는 정말 따라갈 사람만 따라
가게 되겠거니 싶달까... 더불어 그의 방식에 대한 반대 또한 여러 모로 확실하게 대두될
것 또한 자명한 와중에 과연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사실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비록 지금보다 폭넓은 호응을 얻었던 데뷔 당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는 여전히 젊고, 따라서 극중 타카키가 그랬듯 그의 미래에는 앞으로도 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고... 저는 믿고 싶군요. 이건 단순히 제가 감독 신카이 마코토에 대해 맹목적일 정도의 호의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 생각할 뿐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과연 이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이 나와 저를 경탄케 할 것인지... 궁금해 하는 동안 벌써부터 기대에 차 떨리는 이 심정을 가눌 길이 없군요.
부디 그 걸음을 멈추지 말아주시길.
그리고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덧1> 옛날 이토 준지의 소용돌이 이후 최고로 애를 먹은 포스팅입니다. 사실 할 말이 좀더 있었
지만 제 기량으로는 일단 여기까지가 한계로군요. 자기 표현에 능한 분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덧2> 일단 이번 수요일까진 상영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만, 클라이막스의 박력은 가정에서 100%
느끼기 힘드니 여건 닿는 분들께선 극장에서 관람할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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